어쩌면 이른둥이들이 만든 필연일지도 몰라요

여기 어른들의 세계를 바꾸는 생명이 있습니다. 힘든 치료를 딛고 세상 밖으로 나온 이른둥이들인데요. 각박한 세상에 살던 어른들은 이른둥이에게 쏟아지는 사랑을 보며 세상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게 됩니다. 잘 키워낸 아이를 기부자로 만든 이른둥이 부모, 이른둥이 아이를 키우며 지원사업을 만든 기획자, 사명감으로 아이를 돌보는 의료사회복지사까지 보이지 않는 연결 속에서 함께 사는 세상을 느끼고 있죠.

아름다운재단이 2004년부터 현재까지 2,600여 건의 입원치료비를 지원하는 동안 수많은 어른들을 만난 건 우연이 아닙니다. 모두가 이른둥이들이 만든 필연이었죠. 이 단단한 필연으로 바뀐 세상에서 이른둥이 가족과 의료 사회복지사, 그리고 이른둥이 지원사업을 처음 설계한 기획자를 만났습니다.

첫 지원 가족

세상이 함께 키운 남매, 또 다른 이른둥이를 키웁니다.

이른둥이 가족 : 송선영, 김인규, 김원석, 김인형

“보세요.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나 잘 자랐어요.”

수업이 없는 토요일, 두 아이가 교복을 입고 들어옵니다. 한 살 터울인 김인규, 김인형 남매를 키워낸 송선영, 김원석 부부는 “많은 사람들이 준 사랑으로 무럭무럭 잘 자랐다고 보여드리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송선영     “인규가 벌써 17살이 됐어요. 민첩하거나 눈치가 빠르지는 않지만 되게 바르게 잘 컸어요. 둘째 인형이도 오빠를 잘 챙기거든요. 인규가 곧 고등학교에 입학하는데 오빠 따라서 같은 고등학교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잘 지내는 모습을 보면 참 예뻐요.” 

부부의 옆에는 790g, 1.8kg으로 세상에 나왔던 이른둥이들이 앉아있습니다. 중학생이 되어 인터뷰 자리까지 오게 될 것이라 낙관했던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25주 만에 세상에 나온 첫 아이, 인규 군은 태어나자마자 신생아중환자실로 향했고, 157일 동안 수치 하나에 불안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송선영 씨는 17년이 지난 지금도 병원에서의 일상을 빠짐없이 기억합니다.

송선영 님

송선영    “인규가 신생아 중환자실로 들어갔는데 그때 참 힘들었죠. 아침, 점심, 저녁으로 면회를 갔거든요. 가서 늘 수치를 보는거예요. ‘오늘은 어제보다 10g이라도 더 늘었나?’하고요. 하루에도 몇 번씩 롤러코스터를 타는 느낌이었어요.”

가슴 철렁한 매일을 더욱 불안하게 한 건 일주일 단위로 찍혀 나오는 병원비였습니다. 인규 군이 태어난 2004년만해도 이른둥이 병원비를 부담하기 위해 집을 팔거나 이사를 하는 가정이 많았습니다.

김원석     “인규는 태어났을때 폐가 펴지지 않은 상태였어요. 호흡을 혼자 할 수 없어서 긴급 처방으로 약을 썼는데 그 약이 비쌌어요. 당시에도 몇 백만 원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입원비, 치료비까지 다 하면 일주일에 천 만원 정도 나온 적도 있죠. 그때 아름다운재단과 연이 닿은거예요. 인규가 첫 번째 지원자로 선정되어서 치료비를 500만 원 지원받을 수 있었죠. 당시 정부나 보건소에서 지원하는 최대 금액이 300만 원이었으니까 참 큰 액수였습니다. 덕분에 한고비 넘겼죠.”

다솜이작은숨결살리기(이른둥이지원사업) 지원 명패

보이지 않는 선한 마음이 이른둥이를 지켰습니다

이른둥이들을 지켜준건 아름다운재단만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송선영     “인형이가 태어나고 나니까 둘을 안고 버스를 탈 수가 없어요. 저희가 사는 지역이 외곽이다보니까 콜택시를 불러도 늦게 오고요. 병원 다니는 길이 너무 힘들어보였는지 교수님이 급하면 본인에게 연락하라고 휴대폰 번호를 주시더라고요. 어느 날은 둘 다 열이 나서 너무 겁이 나는데 병원을 갈 수 없는 상황이라 전화를 했어요. 그랬더니 ‘해열제를 먹여도 괜찮습니다. 4시간 간격으로 먹이고 한 시간 기다려봐서 안내리면 다시 한 번 투약하세요.’ 그런 식으로 늘 답변을 주셨어요. 그 바쁜 사람이…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으면 점심 시간이라도 전화를 주셨죠.”

김원석, 송선영 부부

낯선 타인들의 선의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선하지 않은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송선영     “헌혈차에서 피검사를 먼저 하는데 아이를 낳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철분이 부족했나봐요. 헌혈이 안된다고 했어요. 너무 아쉬워하니까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아기가 수혈을 받아야 하는데 헌혈증을 갖고 가면 치료비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더니, 헌혈차에 있던 사람들이 헌혈증을 주더라고요. 얼마나 고맙던지요.”

또 다른 인규, 인형이를 지키기 위한 선택은 ‘15년의 기부’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면서 송선영씨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두 아이를 들쳐업고 뛰었던 부부의 시간들이 오롯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아픈 시간 속에서 느낀 고마움이 내 아이를 넘어서는 사랑이 되었습니다. 부부는 아이들의 성장이 또 다른 아이들의 성장으로 이어지길 바라며 기부를 시작했습니다.

김원석    “인규가 2살이 되던 해부터 기부를 시작했어요. 병원에서 저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거든요. 제가 당사자였기 때문에 기부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잘 알아요. 작은 돈이지만 치료를 받고 ‘우리 아이처럼 잘 컸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송선영 씨도 아이들이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기부를 이어간다고 말합니다. 목 마르면 물 먹고, 직장생활에서 받는 월급처럼 기부가 당연한 문화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전했죠.

송선영     “아이들이 아직 어리지만 기부가 생활이 되고 습관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항상 감사함을 느끼며 살 길 바라는 마음이거든요. 감나무에서 한 두 개 열매는 새 모이로 남겨주는 것처럼 생활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기부를 할 수 있다면 세상의 변화가 앞당겨지지 않을까요?”

김인규 이른둥이 가족

우리의 세상이 바뀌었다고, 끝난 건 아니잖아요.

김원석 씨는 초극소 이른둥이도 무사히 자라는 세상을 보며 변화를 체감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다른 이른둥이 부모를 위해 꼭 필요한 지원을 당부했습니다.

김원석    “언젠가 중환자실에 있던 아이들을 초청해서 만났어요. 중증이었던 아이들도 좋아진 경우를 보면 재활치료를 잘 받은 경우더라고요. 사회적인 보장제도가 가장 필요하겠지만 아름다운재단이 진짜 필요한 이른둥이 가족에게 필요한 지원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송선영   “일주일 내내 재활치료를 갈 때도 있는데 기동력이 없다보니까 참 힘들었거든요. 택시로 다니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요. 지역에서 이동이 불편한 아이들을 위한 지원이 있으면 좋겠어요. 또 아빠나 엄마 혼자 키우는 아이들도 있고 가족 구성원도 다양해졌으니 지원 대상을 선정할 때 너무 까다로운 서류심사나 조건이 간소화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가족이 써내려 갈 사랑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거예요.

자신들을 포기하지 않고 애써온 부모의 노고를 처음 들은 인규, 인형 남매는 엄마아빠에게 고맙고,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인터뷰 자리에 참여한 아름다운재단 간사 모두 참았던 눈물을 터뜨린 순간이었는데요. 이미 걸어온 길을 다시 짚어가며 반복되지 않도록 기꺼이 나서주신 김원석, 송선영 씨가 있었기에 세상은 반드시 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의 증거를,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바꾼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자, 이제 이 가족과 함께 변화를 이어온 한 사람을 만나러 갑니다.

의료사회복지사

모든 아이가 건강해지는 날을 그리며, 오늘도 출근합니다.

미숙아에서 이른둥이로…16년 간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막막한 병원 생활에서 환자와 보호자들의 편에 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려운 사정을 듣고, 적합한 지원처를 찾고, 서류를 작성하고…. 여느 직장인보다 바쁜 삶을 사는 의료사회복지사입니다. 2006년부터 <이른둥이 지원사업>을 함께 진행해 온 의료사회복지사 송지원 씨는 일상의 틈새로 들어온 변화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5년 전 아름다운재단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는 한없이 슬펐다고 한다면 이제는 파트너로 뭔가 좀 더 같이 해볼 수 있겠다는 의지가 생겼다고 할까요? 이른둥이 치료비의 경우 건강보험공단에서 부담하는 비율이 높아졌어요. 아름다운재단과 같은 민간에서 열심히 했기 때문에 국가의 책임성이 강화된거 같아요. 다른 재단같은 경우에는 국가에서 하겠다고 하면 줄이는데 아름다운재단은 아니었어요. 16년을 꾸준히 지원했으니까요.”

지원 씨가 처음 사업을 진행할 때까지만 해도 사업명은 ‘미숙아 지원사업’이었습니다.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담긴 ‘미숙아’를 대체하기 위해 아름다운재단은 시민 공모를 진행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이름이 바로 ‘이른둥이’죠. 이제는 공식적인 사업명에도 이른둥이라는 이름이 붙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미숙아는 어딘가 부족하고 덜 완성됐다는 느낌이잖아요. 이른둥이는 우리에게 좀 빨리 와줬다는 표현이예요. 일찍 온 만큼 사회에서 뭔가를 더 지원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 같아요. ‘우리가 도울게’, 또 ‘먼저 만나서 반가워’ 이런 느낌이랄까요? 권리를 찾아줘야 한다는 느낌으로 접근하는 것 같아서 더욱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해요.”

 이른둥이 가이드북

“2005년이었다면 살릴 수 없었을 아이를, 2020년에는 살려내더라고요.”

미숙아에서 이른둥이로 시절이 변하는 동안 외국인 이른둥이들이 마주한 세상도 조금 달라졌습니다. 안산은 수도권 드림을 안고 온 외국인이 많다보니 외국인 이른둥이들의 출생 비율이 높았습니다. 보험 적용이 안되는 외국인 이른둥이들은 억대의 치료비가 나오기도 했죠.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는 말은 국적 앞에서 무너지기 바빴습니다.

“이른둥이 지원사업이 내국인을 중심으로 이뤄졌지만 아름다운재단은 달랐어요. 외국인 이른둥이에게도 최대 2천 만원의 입원치료비를 지원했죠. 그때 정말 큰 도움을 받았어요. 절망하는 외국인 부모들에게도 큰 도움이 됐죠.”

외국인 이른둥이의 현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국적과 관계없이 아이의 생명부터 지키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올해 2월에 25주차 외국인 이른둥이가 태어났어요. 당시 아이 엄마가 받은 H2비자를 받은지 얼마 안 됐는데 갑자기 아이를 낳게 된 거예요. 건강보험 가입을 할 수 없어서 치료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죠. 엄마는 무서운 마음이었는지 어느날 본국으로 돌아가버렸고요. 근데, 지역사회가 하나가 되어서 살리더라고요. 경찰, 아동보호전문기관과 2-3번 모여서 회의를 했고, 안산 외국인 상담센터에서는 대사관에서 이야기해서 여권도 발급해줬죠. 병원에서도 치료비 처리를 두고 고심했지만 아이를 위해 배려해줬어요. 덕분에 아이는 지금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제가 어디가서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을 쭉 보겠어요.”

작고 여린 생명들이 건강하게 자라나는 동안 지원 씨의 근무 기간이 15년을 넘기고 있습니다. 5년만 다니려고 했던 직장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보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죠.

“사실 제 전공이 사회복지가 아니예요. 원래는 음악을 전공했거든요. 음악대학은 연주자가 아니면 취업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회복지 공부를 해볼까 하는 마음에 편입시험을 봤는데 덜컥 붙은거예요. 2년 공부를 하다가 연구원을 뽑는다길래 1년 반을 다녔는데 재미가 없더라고요. 그때 대학원 한 번 가볼까 해서 시험을 봤는데 붙었어요. 그렇게 병원에 들어왔죠.”

일을 일로만 생각했다면, 다짐했던 것처럼 5년을 넘기지 못하고 다른 직업을 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원 씨에게 밀려오는 보람과 기쁨이 15년을 이어붙인 접착제가 되었습니다.

“사실 매일 출퇴근만 반복하는 일상에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하기가 참 어렵잖아요. 일하면서 정말 힘든 때도 있지만 마음이 따뜻해지고, 뭉클해지는 순간들마다 그 고비를 또 넘기게 되더라고요. 예전에는 현실에 무너지는 보호자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혼자가 아니었네요’, ‘이렇게 도와주는 곳이 있네요’라고 말씀하시는 세상이 됐고요. 또 이른둥이 아이들이 건강해지고, 성장해가는 과정을 보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더라고요. 그렇게 지내다보니 벌써 15년이 흘렀네요. 하하.”

고려대학교 안산병원 송지원 의료사회복지사

“이제 갓을 쓴 20주년, 더 많은 아이들에게 어른이 되어주길 바라요.”

지원 씨의 사회생활을 함께 시작했던 아름다운재단도 어느덧 20년을 맞았습니다. 오랜기간 사업을 함께 해온 지원씨에게 아름다운재단의 지향점을 물었습니다.

“20살이 사람 나이로 치면 찬란한 시기잖아요. 옛날에는 갓을 쓰는 나이라고 하더라고요. 이제 갓을 쓰셨으니 다음 스텝으로 나아가야 할 때가 아닐까 해요. 어른의 입장에서 아이들이 잘 클 수 있게 도와주는 거죠. 아이를 낳고 키우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지금처럼 노력하다보면 시나브로 좋아질 거라 믿어요.”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수많은 지원 씨들이 있기에, 세상은 조금 더 나아질 겁니다. 누군가 바통을 떨어뜨리더라도 지금 달려오고 있는 또 다른 지원 씨가 반드시 이어받을 테니까요. 이른둥이를 위해 기부를 선택한 부부, 매일 성실하게 자라온 이른둥이들, 그 성장을 꾸준히 응원해온 의료사회복지사들이 보낸 바통은 아름다운재단이 이어받겠습니다. 다시, 함께 달릴 일만 남았습니다.

글 박주희/ 사진 이지환

초기 사업 기획자

내 아이에게서 시작된 10년의 목표, 이른둥이의 세상을 바꿨습니다.

자식 앞에서 한계를 고민하는 부모들, 절망감은 깊었습니다.

허정도 씨의 마음 한켠에는 깊게 자리 잡은 기억이 있습니다. 텅 빈 인큐베이터와 사라진 아이.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울던 아이의 부모. 오래 전 일이지만 그의 마음 속에서는 여전히 생생합니다.

허정도 씨의 둘째 아이는 이른둥이로,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가족의 꾸준한 돌봄 속에 점차 건강을 회복해갔지요.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이 모든 이른둥이에게 해당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아이가 입원해있을때 바람을 쐰다고 계단 입구로 나갔는데 부모들의 우는 소리가 들렸어요. 알고보니 제 아이 옆의 인큐베이터에 있던 아이의 부모였지요. 아이의 치료를 지속할 수 없다는 결정을 한 것 같았어요. 누구나 다 자기 자식은 살리고 싶잖아요. 그런데 계속 치료를 하다보니 현실적인 한계가 온거예요. 그걸 보면서 참 절망감이 컸습니다.”

세상에 일찍 나온 이른둥이들은 폐가 다 자라지 않은 상태로 세상에 나와 호흡을 하기 어려워합니다. 때문에 이틀에 한 번씩 폐의 성장과 호흡을 돕기 위한 폐 표면 계면활성제 주사를 맞아야 합니다.
당시 접종 비용은 보통 사람을 한달 월급보다 높은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이른둥이 부모들은 아이를 위해 주사를 기약 없이 접종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금전적으로 상황이 안 좋을 경우 아이의 치료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죠.

“국가에서 이른둥이 출산했을때 지원해주는 사회적 안전망이 굉장히 약했거든요. 그런데도 둘째 아이가 태어났을 당시 나라에서 출산 장려정책을 폈어요. 셋째를 출산하면 금전적 지원을 해주는 식이었죠. 하지만 태어난 생명부터 건사한 후에야 출산을 장려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접 설계한 ‘다솜이작은숨결살리기’, 제도변화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른둥이 아이를 보며 느낀 절망감은 사명감이 됐습니다. 허정도 씨는 교보다솜이지원팀장이 되던 해, 기업의 사회공헌 차원에서 이른둥이에 대한 지원책을 찾았습니다. 2004년, 교보생명과 아름다운재단이 함께 하는 이른둥이지원사업 ‘다솜이작은숨결살리기(이하 다솜이 사업)’가 시작된 배경입니다.

“민간에서 새로운 접근을 해서 해당 시도가 효과적임을 입증해내면 국가에서 제도나 법으로 만들게 됩니다. 그 마중물 역할을 우리가 해보자 했어요. 혼자서는 할 수 없으니 여러 곳을 접촉했어요. 새로운 방식으로 유연하게 함께 할 곳을 찾다가 아름다운재단을 만났습니다. 아름다운재단의 정체성을 생각하면 이른둥이 지원사업은 예외적인 사업형태가 아닐까 싶었지만요. 유연한 곳이라 생각했기에 사업을 제안했고 그 제안을 아름다운재단이 받아주었기에 함께 할 수 있었어요.”

사업의 목표는 명확했습니다. 이른둥이 지원을 국가의 지원 제도로 수렴하는 것. 돈이 없어 생명을 포기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처음 이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가 지원해봐야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줄 수 있겠냐고요. 그래서 사업의 목표를 정하자고 했죠. 국가에서 이른둥이 지원을 제도로 수렴해서 사회적인 지원체계가 갖춰지도록 하고 싶었어요. 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 10년 정도면 되지 않을까했죠. 많은 사람을 설득하고, 법과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들을 공감시키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른둥이지원사업 초기 기획자 허정도 님

변화의 기반이 되어준 수많은 사람들의 나눔

다솜이 사업은 생명을 살리는 의의가 있음과 동시에 먹먹함을 감당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사업 운영자로서 구해낼 생명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안함에 주저앉는 순간도 있었지만, 사업의 긴 여정에서 꾸준한 공감과 참여를 보여준 사람들 덕에 큰 힘을 받았습니다.

“심사할 때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업 대상자 선정을 논의했어요. 그 과정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지원금액이 정해져 있고, 한 아이를 선택하면 다른 아이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인 거예요. 선정의 마지막 과정에서는 토론하면서 울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교보생명 FP분들이 모금도 해주시고 고정적으로 기부를 해주셔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FP들이 한달 수입에서 일정 부분을 기부하면 여기에 교보생명이 추가 기부금액을 채워 사업에 필요한 금액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다솜이작은숨결살리기’ 기금이 탄생했죠. 덕분에 장기적으로 꾸준히 이른둥이를 지원해올 수 있었습니다.

모든 이른둥이를 지원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다솜이 사업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1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총 2,600여 명의 치료비를 지원할 수 있었고, 이른둥이를 둘러싼 정부 지원제도도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일찍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죽지 않을 수 있는 세상. 그 목표가 실현된 것이지요.

“폐 표면 계면활성제 주사가 건강보험 적용대상이 됐다고 들었어요. 이후에는 이른둥이 입원치료를 위한 본인부담금이 줄어들기도 했죠. 아름다운재단과 열심히 활동하다 보니 관련 주제에 대해 더 공감하게 됐던 것 같아요. 국회에서 세미나도 하고 의사 출신 국회의원을 만나 법안을 제안하고 심포지엄도 했습니다. 해당 제도가 왜 필요한지 계속 설득시켜나갔죠. 나중에는 제도적 변화가 뒤따라오더라고요.”

공적 차원의 움직임을 만들어낸 데 대해, 허정도 씨는 다솜이 사업이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했다”고 말합니다. 분명한 사업 성과를 냈음에도 그는 “성과가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사실 지원을 못 한 아이들이 열배, 스무 배는 많습니다. 사업에서 지원 가능한 사람들의 수만큼 ‘지원합시다’ 라고 말하는 건 쉬워요. 하지만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지원하지 맙시다’라고 말하기는 참 어렵지요. 앞으로는 이런 고민 자체가 사라지는 세상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 세상에 온 것만으로 네가 해야 할 일 중 하나를 한 거야.”

이른둥이로 태어난 허정도 씨의 둘째 아이는 이제 어엿한 대학생이 됐습니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 이른둥이를 둘러싼 현실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허정도 씨는 변화의 계기가 된 아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해요. 너는 모르겠지만 너를 계기로 네가 모르는 친구나 동생들이 살아났다고 말이지요. 이 세상에 온 것만으로 네가 해야 할 일 중 하나를 한 거라고, 그렇게 말해줍니다.”

세상에 빨리 나온 아이들을 가리키는 ‘미숙아’라는 말도, 이제는 시민공모를 통해 지어진 ‘이른둥이’라는 말로 널리 바뀌어 쓰이고 있습니다. 이른둥이를 바라보는 사회의 인식과 제도가 그만큼 성숙해진 것이지요.

“미숙아라 하면 부족한 사람이라는 식의 어감이 붙어요. 세상에 빨리 나왔을 뿐인데 부족한 아이들인가? 그건 아니지요. 이른둥이라는 용어가 참 좋습니다. 세상이 궁금해 빨리 나온 아이들이라는 뜻이니까요.”

인터뷰 내내 허정도 씨는 다솜이 사업으로 살려낸 아이들보다, 어쩌면 살리지 못했을 아이들을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아마 심사에 참여한 모든 위원들의 마음이 같을 것이란 말도 덧붙였죠. 그렇게 뜨끈한 마음을 공유한 사람들의 진심이 모였기에 이른둥이들의 세상이 바뀌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른둥이들이 세상에 나옵니다. 이른둥이가 처한 현실에서 길을 잃을 때 어려움을 이겨낼 힘이 되줄 수 있기를, 나중에는 이른둥이라는 테두리에서 나아가 더 많은 이를 끌어안기를 바라며, 사회적 역할을 꾸준히 해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글 이상미/ 사진 이지환